‘천 개의 고원’ 앞에서

박길룡 / 국민대학교 건축대학 명예교수




네임리스와 이 글을 쓰는 사람은 나이 차이가 조금 난다. 그와 나는 학연이나 지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두 해 전만 해도 피차 잘 몰랐다. 그런데 2014년 이후 이상하게 그와 자주 부딪친다. 무슨 이해에 얽힌 것도 아니고, 공유하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콩쿠르의 심사에서, 길에서, 세미나에서, 그의 건축 현장에서 자꾸 만난다. 이 조우에 어떤 개연성이 있을지 모른다.


나는 요즈음 한국 현대 건축을 현장 학습하는 중이고, 그는 한창 젊은 건축가의 행보를 펼치는 중이다. 그러니까 네임리스와 내가 만나는 것은 그만큼 그는 활동 범위를 넓히고 있었으며, 그는 그동안 우리와의 조우의 확률을 높여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그는 대단히 부지런하다. 건축을 생각할 때는 아카데믹하고, 건축을 만들 때는 뛰어다니며, 건축을 말할 때는 웅변적이다. 그것이, 필자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그를 여러 곳에서 자주 만났을 이유이다. 그 사이에 그는 꽤 오랫동안 작업하였던 삼각학교를 우리에게 가져 왔다. 그것은 우리 교육시설의 역사에서 한 사건이었다.


이 삼각학교 건축의 작업 범주는 대단히 넓다. 프로그램 단계에서 일은 창출이고, 개념을 세우기 위해 현장을 통짜로 외울 기세이다. 계약주와 협의가 지난하지만 납득하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는 모양이다. 무엇보다 집요한 것은 과제에 대한 학습력이다. 이미 학교 건축이라 하면 우리도 수십년의 경험이 있고, 전형성도 쌓였고, 그 합목적성은 꿰어차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하지만 말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세계의 학교를 답사하고 공부한다. 그렇게 해서 네 가지 개념이 걸러진 모양이다.


다양성, 투명성, 공공성, 유동성. 그런데 그것은 모두가 낱낱의 사실이 아니라, 분리되지 않은 통합된 사실일 것이다. 투명성이 공공성을 부추기는데, 공공은 타자와의 관계이니 보여야 관계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다양성에서 공공성이 유발되며, 활달한 공공성이 다양성을 형성한다.


행태적으로 유동성은 다양성과 인과 관계이다. 결국 학교 설계는 이 많은 것을 ‘배치하는 일’이다. 공간으로 틀을 만들고 교육, 학생, 교사, 지적 욕망, 공동성, 사춘기의 정서, 친애 등을 배치하는 일이다.


그 학교는 단순한 삼각의 기학학적 구도의 틀이지만, 거기에 내포될 우연과 사건이 디자인되어 있다. 세 개의 변과 중정은 용의주도하게 계산된 빛과 자연의 구조화이며, 학생과 교사의 행태를 조직하고, 주변의 기대를 계산한다. 거기에 미묘히 들어선 움직이는 이중 축, 벌어진 평행들이 학원(學苑)이라는 현상의 계산법이다.


이번 작업을 보면서 놀라운 것은 그의 건축에 대한 사랑이다. 줄기차게 기록하고, 사회적 합의에 응모하며, 더 전하려고 전시를 만들었고 그리고 이 책을 출판한다. 일종의 자기애(自己愛)로 보이지만, 그만큼 힘겨웠던 노공(努功)이었을 것이다. 건축의 공들이기는 디테일을 보면 안다. 건축가는 가구를 디자인하고 조경을 다듬고 싶다.


그의 작업 중에 사진가 노경의 사진이 눈길을 잡았다. 특히 시공 초기부터 끝날 때까지 한 위치에서 연속 촬영한 시간의 겹사진이다. 그것은 네임리스의 건축 애정을 칠하고 덧칠하고 덧덧칠한 기록이다. 한 장인이 그의 작업을 꼼꼼히 기억하려는 태세이다.


또한 놀라운 장면은 동화 고등학생 3학년이 현장 건너편에서 매일매일 공사 진행을 기록하였다는 사진이다. 아마 카메라를 고정해놓고 매일 셔터를 눌렀으니 그는 그해에 개근상을 받았을 것이다. 필자가 동화고등학교를 답사 방문하던 날, 교감 선생님이 신이 나서 건축을 설명해 주시던 일도 그러하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건축가 보다 학교 식구들이 더 사랑하던 일인가 보다. 건축 공사의 시공성도 정치한 것이 아마 엔지니어들도 이 작업에 혼을 얹었던 것 같다. 그의 세기에서 건축가는 널리 찾을 일이 더 많아질 것이다.


건축이란 사회적 시스템이며 우리는 거기에서 문화를 익힌다. 기능을 위해 건축을 짓는 게 아니라, 건축을 지어 기능을 수확한다. 건축이 합목적성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건축은 사회와 문화의 격물(格物)이다. 건축은 사회 문화를 연출하고, 오브제나 이미징으로 생산되고, 문학이거나 영화 만들 일도 기다린다. 누군가는 전문직으로 건축가가 소멸될 것이라고도 한다. 어떤 극단적인 상상이라 하더라도 건축은 사건처럼 기다릴 것이다.


저 고원들 사이에는 끊임없이 탈주가 감행되고, 리좀의 유혹도 있고, 호시탐탐 노리는 탈영토화, 추상기계라는 종족, 지층화가 현상되고 있단다. 그는 거기로 가는 모양인데, 네임리스의 젊음은 청년 형질(形質)치고는 구조적이다. 이 소질은 튼실한 건축의 조건이지만, 운신 폭을 제한할지 모른다.


이제 그 ‘천개의 고원’ 초입에 들어섰을 뿐이다. 그는 미국건축연맹 ‘젊은 건축가상’이 기억하듯이 서울보다 뉴욕이 더 익숙하다. 그러느라고 서울에서 일이 좀 지체된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땅이 아니라 시대가 영토이다. 우리는 내일 어느 고원 위에서 개념의 탑을 파고 있는 그를 자주 만날 것이다.



Posted by 정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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